효창원? 효창공원?

효창원의 변천

조선시대

원래 조선 22대 왕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던 곳입니다. 그렇기에 효창묘라고 불렸습니다. 이후 왕가의 묘를 더 안치하면서 고종 때 효창원으로 승격했습니다. 그 외에도 문효세자의 생모이기도 한 의빈 성씨의 묘,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의 묘 등이 있습니다. 1944년에 서울 용산에서 지금의 경기 고양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일제강점기 PART1 

구용산 고지라고 불렀으며 1894년 청일 전쟁 당시에는 효창원 앞에서 야영하며 숲이 파헤쳐졌습니다. 일제 패망을 열달 앞둔 1944년 10월 9일 문효세자 묘 등을 고양의 서삼릉으로 이전합니다. 효창공원의 유래입니다. 역사성이 깊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많은 이들이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를 효창원에도 똑같이 자행한 겁니다. 특히나 일제는 이곳에 효창원 골프장 계획을 세웁니다 

※ 일제가 숲을 파혜치기 전에 숲이 울창하였던 효창원의 옛 모습

일제강점기 PART2

식민지 조선에 골프장을 짓기 위해 먼저 나선 사람이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이사로 있던 안도입니다. 1918년 안도는 조선호텔에 주로 투숙하던 외국이 여행객들을 위해 골프장을 계획합니다. 특히나 전 세계적인 스페인 독감과 한국에서의 악성 감기 유행으로 많은 이들이 죽었음에도 효창원 골프장 계획은 계속 추진되었습니다. 당시 효창원 골프코스의 설계자인 던트는 회고록에서 "…. 효창원은 묘가 산재해 있어 묘를 치워버리면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지만 조선인들이 절대로 달갑게 여기지를 않았다. - <한국골프총람>, 1973 " 언급했는데 노골적으로 일제가 진행하였음을 단면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1921년 누구도 원치 않는 한국 최초의 효창원 골프장이 개장합니다.

※ 1923년 6/11 <매일신보> 에 실린 효창원에서 거행한 골프장 대회 사진

광복 이후

일본군 숙영지가 철거됩니다. 8.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 6월 15일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부산을 떠난 특급열차 조선 해방자 호가 서울역에 도착합니다. 김구 민주의원 총리와 함께 플랫폼에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 유해가 최석봉, 윤남의, 이강훈에게 각각 안겨 조계사로 안치됩니다. 20여 일이 지난 후 7/6일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원에 영원한 안식에 들어갑니다. 2년 뒤엔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3인의 유해가 안치되고 49년엔 김구가 서울 운동장에서 국민장이 거행되고 효창원에 안치됩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찾지를 못하였기에 빈 무덤만 이곳에 안치된 상태입니다.

이승만 정권 

이렇듯 효창원은 수많은 역사와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곳이기에 국민이 기억해야 할 장소로서 국가가 관리해야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습니다. 1954년 당시 한국전쟁 중 9/28 수복 작정 중 사망한 많은 이들이 효창원에 임시매장되거나 무덤들이 늘어나 아수라장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2년이 지난 1956년 5월 무렵에는 육군 209공병대대에 의한 운동장 건설공사가 착수되었고, 이와 함께 임정요인묘역의 이장 방침을 유족들에게 통보하는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삼의사묘와 김구묘의 경우에도 운동장 스탠드가 턱밑에 놓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곳곳에서 항의가 빗발쳤지만 잠깐씩 중단될 뿐 계획은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960년 많은 시민 앞에서 효창운동장이 개장합니다. 단면적으로 보면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인다고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곳은 엄연히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곳입니다. 추모의 공간임을 간과하고 많은 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도록 하는 크나큰 역사적 오점임을 알아야 합니다. 

※ 효창원의 연못과 숲을 파괴하고 운동장을 짓겟다는 기사 (1962)

박정희 정권 

이승만 정권 이후 효창원이 회복되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2년 효창원의 묘소를 이전하려고 했다고 유족들의 반발에 부딪힙니다. 1966년엔 백범 김구 묘와 불과 20m 거리에 테니스장을 건설합니다. 1968년엔 골프장 건설을 추진합니다. 특히 1969년엔 독립운동의 성지하고는 어울리지 않은 원효대사 동상과 북한 반공 투사 위령탑을 건설합니다. 주변에 원효로가 있다고 하나 역대 위인의 이름을 무작위로 붙인 사실만 있기에 어떠한 뒷받침되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외에도 새마을 노인회관 등 효창원의 역사적 상징성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 다수 보입니다. 광복 이후에도 숱한 고난을 겪은 효창원의 역사는 응당 우리가 모두 기억해야 할 겁니다. 

다시 세우는 효창원

문화유적이던 효창원 일대가 해방 직전 일제가 손을 대는 바람에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 애국선열의 묘역으로 변신한 지도 80년에 가까운 세월입니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국립묘지에 모셨겠지만 그런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조성되기 시작한 이들 묘역은 하나하나가 사연 깊은 역사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광복 이후 공간적인 측면에서 수난의 굴레를 말끔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분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서둘러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수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먼저 할 일은 ‘효창원’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이 묻힌 공간으로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효창원 독립평화축제>는 이곳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의 생애와 그들이 꿈꿨던 나라의 자주독립과 평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축제입니다. 더불어 ‘효창공원’을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효창원’으로 ‘새로고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